남편과 나는 돈 카슨의 For the Love of God에 있는 성경읽기표로 성경을 묵상한다. For the Love of God는 성경을 통독할 수 있는 유익한 일정표인데, 온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하는 일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멋진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이 사이트에서 매일 전자우편을 받아보길 추천한다. 이 우편에는 성경묵상 목록과 함께 그날의 본문 넷 중 하나를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설명하는 돈 카슨의 글도 들어 있다. 말씀을 따라가면서 카슨이 던지는 한마디는 하루를 바르게 시작하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최근에 우리는 열왕기상 13장을 묵상했다. 전에도 읽은 본문임이 분명한데도 다시 읽으니 내러티브가 낯설게 다가왔다. 이 본문도 카슨이 설명했는데 도전적인 에스겔서의 몇 장을 제시할 뿐, 이 본문에 나와 있는 이상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 유다로부터 북 이스라엘 베델로 온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이상한 사건 말이다. 이 초현실적인 사건은 북 이스라엘 초기에 이곳 베델에서 일어났다. 이 본문을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우리는 이 본문이 다양한 단계에서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러티브임을 알게 되었다.
게으른 단계
열왕기상 13장을 읽으면서도 사자가 눈에 안 들어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자는 이 길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디 보자. 성경 어디에 또 사자와 나오더라? 가령 잠언에서 게으름뱅이는 이렇게 말한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26:13). 그런데 열왕기상 13장의 이야기에는 사자가 실제로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자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쓴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한 관찰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이런 게으른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된다.
도덕주의 단계
열왕기상 13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요구와 순종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결과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어느 지점까지는 말이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돌아간다. 또 하나님이 도중에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명하셨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다.
여로보암 앞에 서 있는 이 선지자를 보면서 우리는 응원을 보낸다. 그가 타락한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넘어가서 잠깐 쉬면서 먹고 마시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말려들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이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경각심과 순종을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시험을 통과하고 좋은 일을 한 직후에 따라오기 마련인 취약하고 독선적인 순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의적으로 또 고집스럽게 불순종한 사람은 여로보암 왕이다. 13장은 여로보암에게 시종 초점을 맞춘다. 여로보암은 백성은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 장소와 절차를 보란 듯이 어긴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제사장들과 제단들을 세웠으며,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극적인 경고 앞에서도 계속 악행을 일삼는다. 편 손이 마르고 제단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여로보암은 자기 손이 낫기만을 바랄 뿐, 예배를 올바로 회복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13장은 여로보함이 지은 죄가 불순종의 죄라고 명시하고 그의 집이 땅에서 끊어지고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끔찍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순종이 이 본문의 도덕적 요지이기는 하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어도 될까? 이렇게 멈추면, 구원의 은총에 이르지 못하고 도덕적 비판에서 그치고 만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단계
순종은 인간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13장은 우리를 이 수준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다. 이 본문을 맨 처음 읽을 때부터 마치 국에 들어 있는 빨간 고춧가루처럼 곳곳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눈에 확 늘어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 어구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거기에 하나님의 관점을 주입한다. “주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여러 번 반복된다. 이 본문의 이야기에서 모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난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여로보암에게 전했고 또 극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그 말씀에서부터, 특이하고 분명히 초자연적으로 사자를 통해 이루어진 그 특별한 이야기까지 말이다. 보통의 사자라면 사람을 물어 죽인 다음에 그 주검 옆에, 그것도 옆에 나귀를 놔두고서 그냥 그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벧엘의 기만적인 늙은 선지자도 이 사실을 뒤집어진 방식으로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 자기도 정반대되는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들 두 선지자의 불순종은 주님의 말씀을 잘못 다루는 데서 비롯된다. 하나는 경솔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맞바꾼다. 다른 하나는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척한다. 안타까운 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제대로 깨닫는 쪽은 가짜 선지자라는 사실이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의 말씀을 어긴 그 하나님의 사람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전에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를 사자에게 내주셔서, 사자가 그를 찢어 죽이게 하신 것이다”(왕상 13:26).
하나님에 집중하여 보면, 이 이야기의 감독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이 야야기의 디테일 하나하나를 주권적으로 지시하신다. 이 거룩하신 감독의 말씀은 최고의 말씀이며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에게 그의 말씀과 뜻을 알려준다는 사실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감독과 자비로우신 계시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내도 될까? 여기서 멈추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주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밝히 깨닫지 못한다.
빅 스토리 단계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삶에 그토록 자비롭게 개입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은 분명히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악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계획이 이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계획 역시 보인다. 그러나 매우 미미하게 보인다. 다윗의 집을 섬기겠다고 남은 충성된 무리가 크지 않으니 말이다.
열왕기하 13장의 독특한 서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왕국이 분열된 후라는 더 큰 역사적 서사의 흐름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다윗에게 영원한 보좌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다윗 왕국이 갈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윗의 아들들과 신하들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선을 추구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 열 지파와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11:37-38) 자기 길로 행했다. 남 유다 왕국의 르호보암은 좀 나을까? 12장을 보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11:36)고 약속하셨다. 13장 도입부에 다윗의 집에서 태어날 요시야라는 아들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가 산당의 거짓 예배를 파괴할 것이다(13:2).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의 집에 대한 희망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저지른 어두운 불순종 가운데서도, 특히 13장의 불순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더 큰 이야기와 연결되어 유일한 희망을 제시하며 그치지 않고 그 빛을 발한다. 심판 때에도 우리는 희망을 본다. 주님의 말씀이 그 심판의 말씀에서 그토록 주권적이고 참되다면, 그 희망의 말씀도 참되어야 한다. 다윗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죽이는 사자도 있지만, 심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유다 집안의 사자도 있을 것이다(창 49:10). 이 사자는 열왕기상 13장 첫머리에서 유다로부터 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사람이 유다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우리 구주를 볼 때, 우리의 묵상은 온전한 빛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겹겹이 쌓여 있는 저마다 신기한 이야기들이 모두 그리스도께 가닿는 이 얼마나 풍부한 내러티브인가. 지금도 주님의 말씀이 모든 복합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망인가. 펴진 채 말라버린 손,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먹고 마신 빵과 물, 나귀를 지키고 있는 사자, 이 얼마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이야기들인가. 날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작가: Kathleen Nielson(미국 TGC에서 여성 사역 담당)
원제: Lions and Levels of Narrati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김은홍
남편과 나는 돈 카슨의 For the Love of God에 있는 성경읽기표로 성경을 묵상한다. For the Love of God는 성경을 통독할 수 있는 유익한 일정표인데, 온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하는 일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멋진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이 사이트에서 매일 전자우편을 받아보길 추천한다. 이 우편에는 성경묵상 목록과 함께 그날의 본문 넷 중 하나를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설명하는 돈 카슨의 글도 들어 있다. 말씀을 따라가면서 카슨이 던지는 한마디는 하루를 바르게 시작하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최근에 우리는 열왕기상 13장을 묵상했다. 전에도 읽은 본문임이 분명한데도 다시 읽으니 내러티브가 낯설게 다가왔다. 이 본문도 카슨이 설명했는데 도전적인 에스겔서의 몇 장을 제시할 뿐, 이 본문에 나와 있는 이상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 유다로부터 북 이스라엘 베델로 온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이상한 사건 말이다. 이 초현실적인 사건은 북 이스라엘 초기에 이곳 베델에서 일어났다. 이 본문을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우리는 이 본문이 다양한 단계에서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러티브임을 알게 되었다.
게으른 단계
열왕기상 13장을 읽으면서도 사자가 눈에 안 들어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자는 이 길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디 보자. 성경 어디에 또 사자와 나오더라? 가령 잠언에서 게으름뱅이는 이렇게 말한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26:13). 그런데 열왕기상 13장의 이야기에는 사자가 실제로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자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쓴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한 관찰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이런 게으른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된다.
도덕주의 단계
열왕기상 13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요구와 순종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결과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어느 지점까지는 말이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돌아간다. 또 하나님이 도중에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명하셨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다.
여로보암 앞에 서 있는 이 선지자를 보면서 우리는 응원을 보낸다. 그가 타락한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넘어가서 잠깐 쉬면서 먹고 마시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말려들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이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경각심과 순종을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시험을 통과하고 좋은 일을 한 직후에 따라오기 마련인 취약하고 독선적인 순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의적으로 또 고집스럽게 불순종한 사람은 여로보암 왕이다. 13장은 여로보암에게 시종 초점을 맞춘다. 여로보암은 백성은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 장소와 절차를 보란 듯이 어긴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제사장들과 제단들을 세웠으며,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극적인 경고 앞에서도 계속 악행을 일삼는다. 편 손이 마르고 제단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여로보암은 자기 손이 낫기만을 바랄 뿐, 예배를 올바로 회복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13장은 여로보함이 지은 죄가 불순종의 죄라고 명시하고 그의 집이 땅에서 끊어지고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끔찍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순종이 이 본문의 도덕적 요지이기는 하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어도 될까? 이렇게 멈추면, 구원의 은총에 이르지 못하고 도덕적 비판에서 그치고 만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단계
순종은 인간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13장은 우리를 이 수준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다. 이 본문을 맨 처음 읽을 때부터 마치 국에 들어 있는 빨간 고춧가루처럼 곳곳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눈에 확 늘어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 어구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거기에 하나님의 관점을 주입한다. “주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여러 번 반복된다. 이 본문의 이야기에서 모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난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여로보암에게 전했고 또 극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그 말씀에서부터, 특이하고 분명히 초자연적으로 사자를 통해 이루어진 그 특별한 이야기까지 말이다. 보통의 사자라면 사람을 물어 죽인 다음에 그 주검 옆에, 그것도 옆에 나귀를 놔두고서 그냥 그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벧엘의 기만적인 늙은 선지자도 이 사실을 뒤집어진 방식으로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 자기도 정반대되는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들 두 선지자의 불순종은 주님의 말씀을 잘못 다루는 데서 비롯된다. 하나는 경솔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맞바꾼다. 다른 하나는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척한다. 안타까운 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제대로 깨닫는 쪽은 가짜 선지자라는 사실이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의 말씀을 어긴 그 하나님의 사람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전에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를 사자에게 내주셔서, 사자가 그를 찢어 죽이게 하신 것이다”(왕상 13:26).
하나님에 집중하여 보면, 이 이야기의 감독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이 야야기의 디테일 하나하나를 주권적으로 지시하신다. 이 거룩하신 감독의 말씀은 최고의 말씀이며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에게 그의 말씀과 뜻을 알려준다는 사실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감독과 자비로우신 계시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내도 될까? 여기서 멈추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주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밝히 깨닫지 못한다.
빅 스토리 단계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삶에 그토록 자비롭게 개입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은 분명히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악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계획이 이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계획 역시 보인다. 그러나 매우 미미하게 보인다. 다윗의 집을 섬기겠다고 남은 충성된 무리가 크지 않으니 말이다.
열왕기하 13장의 독특한 서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왕국이 분열된 후라는 더 큰 역사적 서사의 흐름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다윗에게 영원한 보좌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다윗 왕국이 갈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윗의 아들들과 신하들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선을 추구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 열 지파와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11:37-38) 자기 길로 행했다. 남 유다 왕국의 르호보암은 좀 나을까? 12장을 보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11:36)고 약속하셨다. 13장 도입부에 다윗의 집에서 태어날 요시야라는 아들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가 산당의 거짓 예배를 파괴할 것이다(13:2).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의 집에 대한 희망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저지른 어두운 불순종 가운데서도, 특히 13장의 불순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더 큰 이야기와 연결되어 유일한 희망을 제시하며 그치지 않고 그 빛을 발한다. 심판 때에도 우리는 희망을 본다. 주님의 말씀이 그 심판의 말씀에서 그토록 주권적이고 참되다면, 그 희망의 말씀도 참되어야 한다. 다윗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죽이는 사자도 있지만, 심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유다 집안의 사자도 있을 것이다(창 49:10). 이 사자는 열왕기상 13장 첫머리에서 유다로부터 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사람이 유다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우리 구주를 볼 때, 우리의 묵상은 온전한 빛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겹겹이 쌓여 있는 저마다 신기한 이야기들이 모두 그리스도께 가닿는 이 얼마나 풍부한 내러티브인가. 지금도 주님의 말씀이 모든 복합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망인가. 펴진 채 말라버린 손,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먹고 마신 빵과 물, 나귀를 지키고 있는 사자, 이 얼마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이야기들인가. 날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작가: Kathleen Nielson(미국 TGC에서 여성 사역 담당)
원제: Lions and Levels of Narrati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김은홍